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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이야기 0
 작성자: 후추가루  2014-02-19 16:58
조회 : 2,394  

원효의 무애원융과 그 行化

 

동국대학교 이봉춘

 

Ⅰ. '不 '의 이미지

Ⅱ. 깨달음과 진속무애원융

Ⅲ. 聖과 俗을 아우르는 행화

Ⅳ. 無碍行化의 현재적 의미

Ⅰ. '不 '의 이미지

원효의 호한하고 심원한 사상과 그 큰 삶의 진폭은 그에 대한 섣부른 이해와 평가를 유보하게 한다. 일반의 상식적인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이런 원효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몇몇 파격적인 면모와 함께 그의 간략한 행장을 기록하면서 '元曉不 '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불기, 그것은 어떤 사상이나 고정관념 또는 일정한 규범적 행동양식에서 뛰어나 있음을 뜻함이다. 무엇에도 얽매임 없이 마음 가는대로 계기에 따라 자유롭게 사고하고 활달하게 행동하는 참 자유인의 모습인 것이다. 일연이 표현한 그대로, 원효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에게 참 자유인의 이미지로 와 닿는다.

얽매임이 없는 대자유인의 면모, 그 불기의 이미지를 더욱 극명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은 <<송고승전>>에 실린 <원효전>의 기록이다.

… 발언은 미친 듯 사나웠고 예의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드러난 행동은 상식의 선에서 벗어났다. 거사와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도 들어가고 저 양나라 誌公처럼 금빛 칼 달린 錫杖을 갖고 다녔다. 혹은 주석을 지어 화엄경을 강의하는가 하면, 혹은 祠堂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즐기거나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山水問에서 좌선을 하기도 하였다. 계기를 따라 마음 가는대로 하는데 도무지 정해진 틀이 없었다.

<<송고승전>>의 저자 贊寧이 어디에 근거하여 원효의 풍모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세간과 출세간을 아울러 걸림없이 사고하고 행동했던 신라의 傑僧 원효의 無碍行이 이미 중국에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반증한다.

위에서 보는 원효는 출가수행자라는 일반적인 기준에서라면 분명 파격이며 일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他者의 시각에서이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그렇게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을 원효 자신의 주체적인 문제로 전환시켜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그럴 경우 원효에게 있어 그 걸림없는 사고와 행동은 굳이 파격이나 일탈이 아닌 진지한 삶의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에게 큰 轉回를 가져다 준 깨달음, 그리고 그가 도달한 정신세계에 비추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삼 주목되는 것이 그의 깨달음과 무애원융한 사상이며 그 실천적 삶의 정신이다.

이미 불교사상 자체가 그러하지만, 원효는 특히 대립하는 이원론적 사고의 병폐를 지적하고 그 시정과 조화의 길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하고 있다. 원효사상에 있어서는 일방적인 옳고(是) 그름(非)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과 속, 그 어느 일면만의 긍정과 부정도 인정될 수 없다. 이는 서로 다른 양자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느 일방의 가치만을 고수하는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버림이다. 그런만큼 원효불기의 모습은, 양자의 대립을 넘어서 진과 속을 하나의 구조 속에서 通觀하고 있는 그의 무애원융한 사상과 그 실천적 삶의 표출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Ⅱ. 깨달음과 眞俗無碍圓融

원효의 생애에서 그의 깨달음이 지니는 의미 비중은 막대한 것으로 느껴진다. 깨달음의 사상적 내용과 함께 그 자주적인 각성 이후 원효의 행적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의 깨달음은 첫 번째 入唐 유학의 실패(650년, 34세 때)에 이어, 두 번째의 시도에서 이루어진다(661년, 45세때). 古墳을 土龕으로 알고 비를 피하며 이틀 밤을 묵다가 경험한 우연한 일이 원효에게는 실로 놀라운 깨달음의 계기였다. 이 때 원효는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지난 밤에는 토감이라 편안하더니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墳)에 의탁하니 매우 뒤숭숭하구나. 알겠도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감과 고분이 둘이 아님을.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이에, 원효는 중국으로 가기를 그만두고 오던 길로 발길을 되돌리고 만다. 두 번씩이나 시도했던 유학의 뜻을 버릴만큼 강렬하고 확연한 그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一心'이었다. 토감과 고분이라는 서로 다른 인식(分別忘心)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들을 절실하게 체험하면서 그는 하나인 마음의 본질과 그 작용을 새삼 통찰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원효의 깨달음의 내용은 그가 특히 심혈을 기울여 연구했던 起信論 사상과도 일치한다. 기신론에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 법이 사라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는 문구가 그대로 나타난다. 또 그의 <起信論疏>에서 기신론의 大義를 설명하는 가운데 '一心이외에 다시 다른 법이 없다(一心之外 更無別法). 다만 無明으로 인해 스스로 그 一心을 잘 몰라(迷) 물결을 일으키고 六途에 유전한다'라고 한 것도 그의 깨달음의 내용 그대로인 것이다.

원효의 入唐 유학에의 관심이 특히 玄裝의 새로운 唯識學 분야에 대한 동경에서였다고 한다면, 이미 일심의 도리를 직접 체험하여 사무치게 깨달은 그에게 더 이상 구법유학은 불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으로 가던 발길을 돌렸던 것인데, 여기서 또한 원효의 자주적인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다. 어쨌든 이 커다란 내적 轉回 이후 원효는 오직 이 땅에서 독자적인 교학 연구와 저술에 전력하거니와,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그의 깨달음의 사상적 내용 그리고 그 자주적 각성이 큰 바탕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원효의 교학연구와 저술에 나타나는 특징으로는 흔히 대․소승 교학을 망라하는 광범성과 그 和會的 귀결성을 든다. 그의 교학 연구는 一宗一派에 치우침 없이 불교사상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있으며, 그 주제는 한결같이 '和諍會通'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교 안의 여러 가지 견해와 異諍을 和解시키고 이를 다시 會通함으로써 하나인 마음(一心)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저술 가운데 <화엄경소>에 보이는 일법이나 <법화경종요>에서의 歸一사상, <열반경종요>에 나타나는 和會의 세계나 <금강삼매경론>의 一味觀行 등이 모두 그러하며, 특히 <10문화쟁론>은 이같은 원효의 교학연구의 태도와 사상을 집약해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원론적 대립의 극복, 異諍의 和會라는 입장이 말해주듯이, 원효의 사상과 그가 도달한 정신세계는 無碍圓融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모든 가치와 세계는 眞․俗으로 別立하여 상층․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전개를 보이면서도 一心의 구조 속에 포섭되는 무애원융한 가치이며 세계인 것이다. "마음이 사라지면 土龕과 古墳이 둘이 아니다"라던 그의 깨달음도 그런 의미의 토로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서 진과 속이 무애원융함을 확연하게 체득한 원효가 펼쳐보일 그 行化의 방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가 있다.

Ⅲ. 聖과 俗을 아우르는 행화

고분에서의 깨달음을 통한 첫 번째 전회에 이어 원효가 맞은 또 한차례 마음의 전회는 그의 광범한 교학연구가 다시 한 단계를 넘어서고 있을 때였다. 즉 '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찬술하던 중 제 4, 10회향품에 이르러 절필했다'함이 그것이다. 이는 그 동안 오직 교학연구와 저술로 독자적인 길을 개척해온 원효가 대중교화라는 새로운 실천과제를 깊게 인식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제 원효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대중과 함께 하는 진리의 現在化 그 실천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원효의 마음에 충격으로 와 닿았을 이 새로운 전회는 어디서 온 것일까. 화엄경소를 찬술하던 그가 10회향품에 이르러 드디어 절필해 버렸다면, 그 해답 또한 거기에 있을 것이다.

화엄경은 그 안에 唯心思想․淨土思想등 다양한 교학사상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특히 事事無碍의 법계연기설에 입각한 보살행이 중심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화엄경의 疏를 찬술하던 원효가 붓을 던져 버릴만큼 절실하게 느낀 바가 있었다면 곧 대중을 향한 보살행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보살의 信․住․行에 이어 반드시 있어야할 방향 전환으로서의 회향, 그것이 이제 원효가 가고자하는 길이었다. 회향이란 자기가 닦은 선근공덕을 중생에게로 돌림을 말한다. 중생들이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구제의 행이 곧 회향이다. 그런 뜻에서 화엄경의 열가지 회향 내용은 그 하나하나가 중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렇게 살고 실천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聖과 俗을 함께 아우르는 원효의 無碍行化가 이로부터 시작된다. 원효는 성의 자리에서 속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이미 성과 속이 따로 없음을 통찰해 온 그에게 속은 바로 그대로가 성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千村萬落을 누비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며 기쁨을 나누고 아픔을 어루만졌다.

삼국유사에서는 그런 원효의 行化를 이렇게 기술하였다.

…이미 失戒하여 설총을 낳은 후로는 俗服으로 바꿔입고 스스로 小姓居士라 하였다. 우연히 큰 박을 들고 춤추는 광대를 만났는데 그 형상이 특이하였다. 원효가 그 형상대로 한 도구를 만들어 이름을 화엄경의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 한 것으로써 '無碍'라 붙이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이를 가지고 천촌만락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으며 돌아다녔으므로 가난한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法化가 크도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위 글귀는 화엄경 菩薩明難品 제 6에 나오는 게송이다. 속복을 입고 거사임을 자처하며 저자 거리로 시골로 방방곡곡을 누비는 원효의 무애한 행화는 곧 삶과 죽음을 뛰어 넘은 이의 모습이다. 일체에 걸림이 없어 생사마저 벗어났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떤 애증이나 차별의 경계가 존재할 리 없다. 그는 곳이 어디이든 만나는 사람이 누구이든 그 장소와 대상은 모두 원효가 이루어야 할 淨土였고 자비로 안아야 할 중생들인 것이다.

원효가 접하는 대상이 위로는 왕실의 인물이나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가난하고 몽매한 사람들에 이른 것처럼, 그가 돌아다닌 천촌만락 또한 이미 亡國한 옛 고구려이며 백제의 고토였고 통일을 이룩한 새로운 신라의 땅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이 성속을 함께 아우렀던 원효의 이 같은 행화야말로 이 땅의 모든 계층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구제하려는 그의 보살적 염원이었고 실천이었던 것이다.

Ⅳ. 無碍行化의 현재적 의미

眞俗無碍行化롤 표현할 수 있는 원효의 사회적 실천은 곧 그의 깨달음과 사상으로부터 나오고 있음은 물론이다. 원효의 깨달음과 그가 개척하고 완성해낸 사상은 한 마디로 一心이었다. 그리고 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으로서 원효는 和諍․和會의 논리를 수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깨달음과 사상만으로 원효의 탁월성과 위대함을 말하기에는 미진함이 있다. 그의 진면목은 그 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사상의 행동화와 실천에서 더욱 돋보이기 때문이다. 원효는 그가 이루어낸 사상을 중생을 위한 회향, 즉 보살의 실천행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곧 진속무애행화가 그것이었다.

원효는 신라통일 전후의 복잡하고 여려운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삼국이 서로 각축을 벌이던 시대에 태어난 그는 백제가 멸망(660년)하던 즈음 고총에서 깨달음을 얻었고(661년), 이후 교학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며 내면의 세계를 확장해 가던 중에 고구려의 멸망(668년)을 지켜 보기도 하였다. 전쟁의 소용돌이, 정복과 피정복의 갈등, 亡國 流民들의 실의와 좌절, 그것이 곧 一心을 깨닫고 和會의 논리를 세웠던 원효 시대의 엄연한 현실상황이었다.

원효가 거사의 모습으로 전국 방방 곡곡을 누비며 빈부귀천의 계층에 구분없이 대중과 함께 하며 무애행을 펼쳤음은 다른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깨달은 一心․화쟁총화의 사상을 새로운 현실 속 신라에 실제적으로 구현하기 위함에서였음에 틀림없다.

백제와 고구려을 정복하고 신라가 통일을 이룩했다지만, 영토나 정치적 통합만으로는 완전한 통일일 수 없다. 그것은 강제된 외형 만의 통합이며 불완전한 통일일 뿐이다. 여기서 원효는 진정 하나가 되는 통일을 위해 저술하던 붓을 던지고 일어섰다고 보아야 한다. 동지와 적, 분열과 통합,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둘이 아닌 그러한 통일을 원효는 진정한 통일로 여겼을 터이다. 그리하여 저마다 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 화쟁회통하여 서로 가슴을 열고 함께 사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 그는 聖과 俗에 구애 되지 않는 無碍의 行化를 유감없이 펼쳐간 것이다.

부조화의 현실을 완전한 조화와 희망의 현실로 바꾸는 일이 사상이나 관념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몸을 던지는 실천에 의해서만 도달 가능한 일이다. 대립의 오류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 드러나 있는 현상에 대한 의식의 일대전환 위에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껴안는 보살적 실천으로서만 비로소 이룩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뜻에서 그 시대의 현실에 직접 몸을 던졌던 원효의 행화는,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큰 일깨움을 준다.

원효의 行化를 염두에 두고 오늘의 현실로 눈을 돌렸을 때, 우리는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한 문제로서 민족의 통일문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반세기 가까이 남과 북이 대치해 있는 우리의 현실상황은 신라 시대 원효가 겪었을 그 어려움과 갈등 보다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다. 시대와 국제적 정치환경의 변화에도 관계없이 남과 북의 상호 몰이해와 적대감의 골은 여전히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야 함은 이 시대 대 명제이자 필연적인 과업이다.

이같은 민족의 절대과업을 전제로 우리의 사상적 안목과 그 실천의 방향을 세우고자 할 때, 우리는 원효의 사상과 몸을 내던졌던 실천적 삶을 통해 그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7세기 신라 원효의 一心과 和諍會通 그리고 無碍의 行化가 주는 현재적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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